곤란하게도 주말인데 밥솥이 고장 났다.
물론 돌솥이나 냄비에 밥을 해도 되기는 한데… 밥솥이 말을 안 들으니 뭔가 해 먹겠다는 의욕 자체가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저녁을 아예 먹지 말까, 싶었다가도 그래도 굶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배달이라도 시키려 했지만 그래도 이참에 떨어진 즉석밥을 사서 쟁여두기로 결정.
해서, 집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즉석밥을 잔뜩 사 들고 오기는 했는데…
뭔가 요리할 의욕은 사그라졌고 배는 고프니 간단하게 먹자 싶었던 나는, 만만한 김치볶음밥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김치를 꺼내 썰기 시작했다. 일단 적당히 2인분 정도의 양을 썰다가… 사고회로가 갑자기, 밥솥 고칠 때까지 그냥 김치볶음밥으로 끼니를 때울까?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시작된, 김치볶음밥 대량생산 계획.
김치볶음밥은 이런저런 재료 들어가는 것보다 심플하게 김치, 햄 또는 소시지면 된다는 주의다. 뭔가 맛을 낸다고 이것저것 다 집어넣는 건 싫어하는 편이다. 본디, 김치란 게 ‘돼지’와 진짜 찰떡궁합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
햄이나 소시지도 결국 돼지고기.
마침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햄 한 덩이가 있기에, 그걸 후다닥 썰어서 김치와 함께 달달달달 볶았다. 잘 익은 김치였던 터라, 신맛을 살짝 잡기 위해 설탕을 조금 뿌려주고 감칠맛을 내기 위해 다시다(…)를 조금 털어 넣어줬다. 그리고 고춧가루를 탈탈 넣고 볶아주니…
이대로 그냥 반찬 삼아 먹어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내 목적은 김치볶음밥이었기에 미리 포장을 벗겨둔 즉석밥‘들’을 우르르르 쏟아 넣고 다시 들들들들 볶아준다. ── 데우지 않은 즉석밥이라서 볶을 때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즉석밥으로 볶음밥 할 때 즉석밥을 데우지 않는 걸 추천하는 편.
그리고 마무리는 참기름을 휘리릭~
이런 식으로, 팬 하나에 즉석밥 300g짜리 세 개씩 해서 열심히 두 번 볶았다. 밥양만 총 1.8㎏에 김치와 햄의 양까지 해서 어마어마한 양의 김치볶음밥이 완성!! ── 이제 내가 저녁으로 먹을 정도만 따로 그릇에 옮겨 담고 나머지는 그대로 식혀서 용기에 담아 냉동고로 들어가면 며칠간 먹을 김치볶음밥 대량생산 완료!
평소라면 반숙 달걀프라이라도 두 개 얹었을 테지만… 애초에 요리하기 싫어서 햇반 사 와놓은 주제에 아무리 충동적이라지만 김치볶음밥을 대량으로 생산해냈으니 진짜 만사가 다 귀찮아져서 그냥 참깨만 솔솔 뿌려서 대충 퍼먹었다.(…) ── 체력과 의지력 분배에 실패한 셈.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보니 김가루 뿌리는 것도 까먹었네… 그건 귀찮은 일도 아닌데……
체력과 의지력도 모자라 기억력까지 분배에 실패한 거구나, 나란 놈…(…)
그래도 김치볶음밥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도 않고 맛있어서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굳이 반숙 달걀프라이가 없어 아쉬운 점이 있더라도 맛있었으면 된 거지 뭐! 분명, 얹으면 더 맛있었겠지만… 이미 뱃속에 들어가 소화된 걸 인제 와서 후회해봤자……
으으… 이왕 귀찮은 짓 한 거 조금만 버텨서 달걀프라이 부칠 걸 그랬나 봐!! 으아아앙~! (…)
밥솥 고장 난 핑계로 밥하는 게 귀찮다며 즉석밥 사 와놓고 열심히 김치볶음밥 해댄 내가 참…… 식혀둔 볶음밥 전용 용기에 담아 냉동고에 차곡차곡 쌓으면서 살짝… 아니 대놓고 현타가 확~ 몰려오는데… 하 씨… 나 대체 뭐 하는 새끼인 거냐 진짜……